성경으로 읽는 한국 교회 이야기(6) | 최은광 | 2020-12-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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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쌀 교인이 참 교인이 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한 6: 26-27)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 명 이상을 먹이신 이적을 목격하거나,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왔다.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그 분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하였다. 무리는 그를 ‘지도자’로 세울 작정을 한 것처럼 보였다. 제자들도 흥분했다. 이 지지 세력을 잘만 묶으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혁명은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은 분명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정말 눈앞에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정작 알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이었다. 무리를 조직하고 훈련하기는커녕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피해 ‘혼자 산으로’(요 6:15) 들어가셨다가 추적을 받자 ‘바다 건너’(요 6:25) 도망치셨다. 거기까지 쫓아 온 무리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 “떡을 바라고 왔느냐? 그렇다면 잘못 찾았다. 내게 썩을 양식이 아닌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
예나 지금이나 ‘썩을 양식’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선교 초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가면 먹을 걸 준다”는 말을 듣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교회에서 나누어 주는 물질에만 관심을 두었지 예배나 설교엔 관심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이런 교인을 가리켜 ‘쌀 교인’(rice Christian)이라 불렀다. 이런 교인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출석하다가 문제가 (다른 것으로) 해결되거나, 반대로 (교회가) 해결해 주지 못하면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난다. 이런 ‘쌀 교인’이 선교나 목회에 방해 요인이 될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이런 ‘쌀 교인’을 교회 밖으로 몰아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이런 ‘쌀 교인’을 ‘참 교인’(real Christian)으로 만드는 것이 목회가 아니던가?
‘쌀 교인’의 속셈
동학 혁명(1894년)으로 사회 분위기가 아주 좋지 않던 1895년 초에 전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관군의 승리로 동학군들이 퇴각하기는 했지만 혁명군들의 저항 본거지였던 전주에서 기독교 선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학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전주에 내려와 선교를 시작할 때만해도 ‘새로운 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수 백 명 몰려들었고 개종을 결심하고 세례를 받겠다는 교인들도 열 명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난리’를 겪으면서 다 떨어져 나갔고 게다가 전주 양반들은 집집마다 대문에 부적처럼 ‘축귀양인’(逐鬼洋人) 글귀를 써 붙이고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펼쳤다. 선교사들이 다시 전주에 내려왔건만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선교사들은 선교 중단의 위기를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에게 ‘희망의 빛’ 같이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이 있었다. 1년 전에 세례를 받기로 약속했던 인물이었다. 장사꾼이었는데, 주일이 장날과 겹치지 않는 한 매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무엇보다 1백리 길을 걸어 예배에 참석하는 열성에 선교사들은 감동했다. 선교사들은 그를 두고 암울한 상황에서 “밝고도 특이한 별”(a bright and special star)이라 칭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오래 가지 못했다. 남장로회 선교사 레이놀즈(W.D. Reynolds)의 증언이다.
“그러나 그 빛도 오래 가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몇 주간 잘 나오더니 한 번은 우리한테 와서 10달러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온 대가를 계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일당을 계산해 달라는 장사꾼의 요구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런 식이었다. 초기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대가를 바라고 나오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1894-95년 동학혁명과 청일 전쟁 ‘난리’ 가운데 교회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치외법권적’ 성역인 것이 증명되면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들어오는 교인들이 늘어났다. ‘쌀 교인’과 ‘참 교인’을 구별해 내기란 쌀에서 겨를 골라내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마 3:12).
‘계꾼 교인’이 ‘참 교인’이 되기까지
비슷한 무렵(1892년), 인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미감리회 선교부에서는 존스(G.H. Jones) 선교사를 내려 보내 인천 선교를 착수하도록 하였으나 개종자를 얻기 어려웠다. 인천 사람들이 좀처럼 마음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를 도와 전도 일을 하던 이명숙이 “계를 만들자”는 계책을 냈다. 당시 계는 목돈 타는 것도 목적이었지만 그보다 힘없는 사람들끼리 조직을 만들어 서로 보호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교회에서 계를 한다니까 “외국인 선교사들이 뒤를 봐 준다”는 소문이 돌면서 세관원이나 탐관오리 등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장사꾼들이 몰려 왔다. 순식간에 ‘계꾼 교인’ 50여 명이 생겼다. 곗날은 물론 주일이었고, 계하는 곳도 예배당이었다. 선교사는 매주일 예배당에서 ‘돈’에만 관심이 있는 ‘계꾼 교인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교회에서 하는 계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계꾼 중 하나가 돈을 챙겨 도망치자 계는 깨졌다. ‘계꾼 교인들’이 교회 출입을 끊은 것은 물론이고 교회 평판도 나빠졌다. 아니함만 못한 일이 되었다. 선교사는 인천 선교의 문이 아예 닫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계가 깨진 다음 주일, 기대하지 않았던 ‘계꾼 교인’ 둘이 예배당에 나타났다. 처음엔 뜯긴 돈을 돌려달라고 온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예배당에서 들은 말씀이 좋아서 왔습니다. 계속 나와도 되는지요?”
그들도 처음엔 ‘계꾼 교인’이었다. 그런데 주일마다 예배당에 와서 들은 말씀이 어느 사이엔가 그들 마음 속 깊은 곳에 들어박힌 것이다. 설교를 귓등으로 들었던 다른 ‘계꾼 교인들’과 달랐다. 이들이 인천에서 얻은 첫번째 구도자들로서 오늘 인천 내리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이 둘 중 하나가 강화 출신 이승환이었다. 인천에서 주막집을 하고 있었는데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다. 존스는 그에게 세례를 받도록 권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세례받기를 거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아직도 술을 파는 주막집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세례를 받지 못하는 첫째 이유요, 둘째는 세례는 천국 백성이 되는 가장 큰 축복인데 그 좋은 일을 어찌 어머님보다 먼저 받을 수 있겠는가?”
이승환은 주막을 처분하고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했다. 아들의 전도를 받고 어머니도 믿기로 했다. 그리하여 1893년 여름, 존스는 배를 타고 강화도 북쪽 해안, 이승환의 고향 마을로 갔다. 그런데 그 마을에 고집 센 양반 ‘김초시’가 있어 서양인의 상륙을 허락지 않는 바람에 이승환은 어머니를 업고 존스의 배에 올라 밤중에 세례를 받았다(김초시[김상임]도 그 후 개종하고 전도사가 되었다). 이로써 강화 최초 세례 교인이 나왔고 그 때부터 이승환의 고향 집에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강화 ‘모교회’인 교산교회의 출발이다.
남은 자가 머릿돌이 되다
한말 정치․사회․경제․종교적으로 혼란이 극심했던 시절,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받기 위해, 혹은 교회나 선교사 힘을 빌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쌀 교인’들이 대거 교회로 몰려들었다. 1895년 어간에 한국 교회가 교세에서 급성장을 이룩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들어온 ‘쌀 교인’들은 오래지 않아 기독교의 정체(?)를 알고 나서 실망하고 대부분 떠나갔다. 그런 가운데도 예배당을 출입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말씀의 씨앗이 가슴 속에 박힌 사람들은 ‘참 교인’이 되어 남아서 토착교회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머릿돌이 된 베드로의 고백과 같았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리이까?”(요한 6: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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