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읽는 교회사 이야기(4) | 최은광 | 2019-11-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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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같은 날 둘이 함께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나니”(고전 3: 6)
선교는 협력이다. 혼자 하는 선교는 없다. 천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일은 짝을 지어 하도록 되어 있다(창세기 2:18). 독점이나 독단은 금물이다. 선교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손을 잡고 하도록 되어 있다. 한 때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된 것이 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인천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 가운데 과연 누가 먼저 한국 땅에 상륙했을까?” 이 질문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그 날 현장에 대한 주인공들의 언급은 물론이고 목격자들의 진술도 없는 상황에서 소모적이고 의미 없는 질문일 뿐이다. ‘모교회’, ‘장자교단’의 권위를 독점하려는 교권주의자들의 관심일 뿐이다. 그 날의 역사 현장에서 읽어야 할 메시지는 따로 있다.
보이지 않는 손길, 모으시는 하나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비록 교파는 달랐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신앙적인 면에서 그렇다. 아펜젤러는 본래 칼빈주의 계통인 개혁교회 신앙 전통 집안에 성장했지만 대학 재학 중 중생의 체험을 한 후, “맘 놓고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교회를 찾아” 감리교회로 적을 옮겼다. 누구보다 장로교 신앙과 신학 전통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장로교 선교사들과 말이 잘 통하는 감리교 선교사로 인식되었다. 언더우드 역시 집안 대대로 전해오던 개혁교회 신앙 전통을 지키면서도 감리교회의 경건주의적이고 체험적인 면을 중요시하였다. 그는 장로교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시끄런 감리교도”(roaring methodist)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감리교적인’ 장로교 선교사였다. 두 선교사는 신앙에서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다.
두 선교사가 처음 만난 것은 두 사람 모두 신학생 시절인 1883년 10월, 미국 커네티컷주 하트포트에서 개최된 초교파 신학생 수련회였다. 뉴튼, 하지, 고든, 타운센드 등 각 교파를 대표하는 미국 신학자들이 강사로 참석한 이 모임은 이미 타오르고 있던 신학생들의 ‘해외 선교’ 열풍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 모임에 언더우드는 뉴브런스윅신학교 대표로,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는데 모임 중에 두 사람이 만났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둘 모두 이 모임에서 해외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결단하였다. 둘은 ‘해외 선교’에 불타는 열정의 신학도로 만나고 있었다.
또한 두 선교사 모두 처음 계획과 다른 곳을 선교지역으로 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언더우드는 본래 인도 선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지를 결정하는 마지막 순간에 “한국엔 갈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한국은 어이할꼬?”(No one for Korea! How about Korea?) 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은 후 생각을 바꾸어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펜젤러도 처음 계획은 일본 선교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무사(사무라이) 계층에서 집단적인 개종이 이루어지고 있어 조상이 스위스 용병 출신이었던 그에게 일본은 매력 있는 선교지였다. 반면 한국은 아시아에 마지막으로 남은 ‘은둔국’으로 여전히 위험한 나라였다. 그런 한국을 기숙사 같은 방 동료 워즈워드가 선교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졸업을 1년 앞두고 개인 사정으로 선교사로 나갈 수 없게 된 워즈워드가 아펜젤러에게 “내 대신 한국에 갈 수 없겠는가?” 하여 고민 끝에 친구 대신 한국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모두 처음 생각과 달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끌려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함께 하는 ‘에큐메니칼’ 선교 여행
이처럼 비슷한 체험을 공유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같은 날, 같은 배로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둘은 선교 처녀지(terra firma) 한국에서 협력하며 선교의 기틀을 닦았다. 두 사람은 우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둘은 읽을 수는 없었지만 한국에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온 이수정 번역 성경을 대본으로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2년 만인 1887년 여름,《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라는 제목으로 쪽복음을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하였다. 이 쪽복음은 성경의 국내 번역시대의 개막을 알리면서 동시에 ‘공동 번역’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이것을 계기로 초교파 성서사업 기구가 조직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업이 한국 교회 전체의 사업이 되기를 원했다. 두 선교사는 비록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교파 교회 형태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선교지에서만큼은 서로 협력하였고 그러한 신앙 일치와 선교 협력의 기반으로 ‘하나의 성경’을 사용하는 전통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1887년 2월 7일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감리교에서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장로교에서 언더우드와 헤론 등이 참여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대한성서공회의 출발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사람은 복음 전도와 목회 분야에서도 협력하였다. 내한 이듬해 부활절(1886년 4월 25일)에 아펜젤러와 스크랜튼의 딸들이 국내 개신교 최초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아펜젤러가 집례하고 언도우드가 보좌하였으며 그 해 7월 18일에는 한국인으로는 국내 최초로 노춘경이 개신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언더우드가 집례하고 아펜젤러가 보좌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언더우드 집에서 주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주일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언더우드 사회로 아펜젤러가 설교하였다. 이것이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는 주한 외국인교회의 시작이다. 한국인 교회는 1887년 9월과 10월, 열흘 간격으로 설립되었는데 장로교회는 언더우드의 정동 사택 사랑방에서, 감리교회는 아펜젤러가 토착인 전도자를 위해 구입한 남대문 안의 ‘베델예배당’에서 각각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의 출발로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서로 상대방 교회의 출발을 축하하며 전도인을 서로 교환하며 협력하였다.
지방 선교에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협력은 두드러졌다.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아펜젤러가 1887년 4월 평양 여행을 시도하였고 그가 얻은 여행 정보를 바탕으로 10월에는 언더우드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1888년 4월에는 둘이 함께 두 달 예정으로 의주까지 다녀올 계획으로 북부 여행을 떠났다. 명동성당 건축을 빌미로 정부에서 급작스럽게 선교 금지령을 발표하는 바람에 여행은 한 달 만에 평양에서 중단되고 말았으나 이 선교 여행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개척 선교사들이 함께 시도한 지방 선교 개척 여행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년 세월이 흐른 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선교 중첩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선교 지역 협정을 맺어 한반도를 교파별, 선교부별로 분할해서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의 교파의식에 지방색이 겹쳐짐으로 교회 갈등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지만, 적어도 한국 선교를 개척했던 아펜젤러, 언더우드 두 선교사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속했던 교파와 선교부를 초월하여 ‘하나 된 교회’를 지향하는 분명한 선교 의식이 있었다.
에큐메니칼운동의 출발점
훗날 천국에 가서 아펜젤러, 언더우드 두 분을 만났을 때, “두 분 중 누가 먼저 한국 땅에 발을 디뎠습니까?” 라고 물어보아도, 글쎄, 내가 아는 한, 두 분은 그저 미소로 답을 피하실 것 같다. 그래도 대답을 채근하면, “둘이 함께 왔지” 정도로 답할까? 서로 자기가 먼저라고 우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당시 두 분의 머리 속엔 “내가 저 친구 보다 먼저 한국 땅을 밟으리라”는 경쟁심이나 욕심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한국에 오기 전, 그리고 오고 난 후 보여준 삶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둘은 선교와 교육, 전도와 목회, 모든 분야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동역자였다. 둘은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독점이 아닌 나눔으로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닦았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칼운동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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