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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읽는 한국교회 이야기 (2) 운영자 201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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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늘 눈인가? 바늘 귀인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매...”(요한 1:14)

기독교 신앙과 역사는 성육신 사건에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1882324, 만주 심양(봉천)에서 인쇄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는 최초 한글 성경이란 연대기적 가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의 한글 번역은 하느님께서 우리말로 말씀하시기 시작한 말씀의 방언화의 시작이자 기독교가 우리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는 복음의 토착화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사투리 성경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은 선교사와 한국인들의 합동 작업이었다. 선교사는 헬라어 성경과 영어 성경을 대본으로 하였고, 한국인들은 한문 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한 구절씩 번역해 나갔다. 로스에게 처음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던 이응찬을 비롯하여 김진기이성하최성균 등 성경 번역에 참여한 한국인들이 하나같이 평안도 의주 출신이었다. 그러니 번역된 성경 본문이 평안도 사투리 일색일 것은 당연하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당시여예수 셩신으로써희락하여갈으되아반이텬디의쥬 내아반이를칭찬하더니이일을즐거운쟈와통달한쟈의게는감추고젹자의게낫타내엿스니션한디라아반이이갓트면아반이의깃버하넌바니이다.”(1021

 

100년전 말이라 읽기가 쉽지 않다. ‘아반이’(아버지), ‘오만이’(어머니), ‘텬디’(천지), ‘션한디라’(선한지라) 등 평안도 사투리도 어색하다. 그러나 의주출신 번역자들에겐 평안도 말이 표준어였다. 그들은 고향 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예수님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달리다굼”(5:41), “에바다”(7:34) 같이 고향 사투리(아람어)가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장사꾼 출신 번역자들은 일상적으로 쓰는 평범한 말 가운데서 성경 어휘를 찾았다.

누룩금하넌날이오니넘넌졀양잡넌때라예수 피들요안내를보내여갈으되너의가넘넌졀연셕을예비하여우리를먹게하라하니”(227-8

 

훗날 한문을 좋아하는 유식한(?) 번역자들이 무교절’(無酵節), ‘유월절’(踰越節)로 번역하여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들에겐 무슨 뜻인지 모르게 만들어 놓은 것에 비하면 누룩을 금하는 날’(Unleavened Day), ‘넘는 절’(Passover)은 훨씬 쉽게 다가온다. 그들은 쉬운 단어를 골랐다. 다만 우리말에는 없는 용어, 예를 들어 피들’(Peter), '요안내’(John), ‘다빗’(David) 같은 고유명사는 외국 발음 그대로 표기하였다. 외래어와 우리말의 조합 형태로 만든 것도 있는데 안식일’(安息日, Sabbath)사밧일’, ‘세례’(洗禮, Baptism)밥팀녜로 표기한 것이 그런 경우다. 이런 식으로 우리 언어 전통에 없던 기독교용어들이 우리말로 표기되면서 그 행위와 의미가 우리 종교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왔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이처럼 성경 번역 과정에서 외국어와 우리말, 서로 다른 언어가 만났다. 둘 사이에 통하는 부분도 있었으나 막히는 부분도 많았다. 그때마다 선교사와 한국인 번역자 사이에 토론과 논쟁이 빚어졌다. 누가복음 1824절을 번역할 때 일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문제는 바늘 귀란 단어였다. 선교사들이 대본으로 삼고 있는 영어 성경에는 ‘eye of needle’로 되어 있었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영어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고 있던 선교사들은 축자 번역을 고수했다. 영어 단어 하나에 해당하는 한글 단어를 찾아 직역하였다. 그런 식으로 ‘eye’를 번역하면 ’()이다. 그래서 선교사는 바늘 눈이라 했다. 그러자 한국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낙타가 바늘 눈으로 들어간다?” 뜻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교사가 바늘에 뚫린 구멍을 그렸다. 그러자 한국인들은 무릎을 치면서 바늘 귀!” 하였다. ‘바늘 귀를 영어로 직역하니까 ‘ear of needle’이 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선교사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부터 바늘 눈을 주장하는 선교사와 바늘 귀를 주장하는 한국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헬라어 성경의 트레마’(τρημα)나 한문 성경의 침공’(針孔)처럼 바늘 구멍이라고 해도 뜻이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긴 논쟁 끝에 한글 성경은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의미 상통’(意味相通) 번역 원칙이 축자적 직역 원칙을 눌렀다. 그리하여 완성된 본문.

예수 보고갈의되자물잇넌쟈하느님의 나라에나아가미얼여운디라약대바늘귀여나가미부쟈하느님의 나라에나아가넌것보담오이러쉽다하니.”

 

우리말로 말씀하시는 하느님

 

바늘 눈에 대한 바늘 귀의 승리는 번역의 주도권이 선교사보다 한국인에게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증거는 수 없이 많다. 눈이 예민한 독자는 이미 여러 차례 인용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본문에서 띄어쓰기 원칙이 지금과 전혀 다름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초기 한글 성경에는 현재와 같은 한글 맞춤법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내려쓰기로 되어 있는 본문에 띄어쓰기는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유독 어떤 특정한 성격의 단어들이 나올 경우엔 그 단어 아래로 한 칸씩 띄어 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 뭇사람의게닐너갈으되사람이엇디키리스토를 다빗의자손이라하너냐시편에다빗이스서로말이쥬 나의쥬게 닐으되나의우켠에안저나의원슈로네반등되기를기다리라하니다빗이키리스토를 쥬라 칭한즉엇디그자손이되랴하고”(20:41-44)

 

하느님’, ‘텬부’, ‘예수’, ‘’, ‘키리스토’(그리스도)란 단어만 나오면 예외 없이 한 칸 씩 띄어 쓰고 있다. 이같은 표기법을 대두법’(擡頭法)이라 한다. 영어 문화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동양 문화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표기법이다. 전통적으로 띄어쓰기가 없는 중국이나 한국 문헌에서 본문 중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단어, 예를 들어 황제나 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나올 경우엔 단어 앞 혹은 뒤로 몇 칸씩 띄어 쓰거나 아예 줄을 바꾸어 새로 시작하였다. 그런 단어는 한 눈에 들어왔다.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동양의 예법이었다. 성경 번역자들은 이런 대두법을 채용하여 왕이나 황제 대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했다. 예배와 존경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이런 대두법은 선교사 문화가 아닌 것이 분명하고 그런 점에서 초기 한글 성경 번역 과정에서 한국인 번역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는 우리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복음의 토착화는 이미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한글 번역은 우리 민족과 문화 속으로 들어오시는 말씀의 성육화(成肉化, incarnation)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야훼로 계시되었고 헬라인들에게 데오스, 영국인들에게 으로, 중국인들에게 샹티로 계시되었던 성경의 그 분이 우리 민족에게 하느님’(혹은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말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매......”

 

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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